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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달픈 근대사가 서려있는 장충단공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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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달성군장애인복지관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0-07-2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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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등 희생자 추모 위한 대한제국 국립현충원 장충단
일제 장충단 헐고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 기리는 박문사 설치
해방 후 박문사 사라졌으나 비석만 남은 장충단 제자리 못잡아
아름다운 실개천 따라 설치된 데크로드 무장애 공간으로 개선

서울 장충동의 장충단공원은 민족의 험난했던 근대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19세기 말 아직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조선 땅은 청•일간 세력다툼의 희생물이 되어 갔다.

기존의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청나라와 호시탐탐 조선 진출의 기회를 엿보며 야금야금 세력을 확대해 가던 일본은 이 땅에서 사사건건 부딪혔다.

늦게나마 근대화를 배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들은 그때마다 우리 뜻과는 반대로 외세개입의 빌미가 되었다.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고, 갑신정변(1884)이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청나라 주도권이 강해져 갔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더욱 교묘하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압박해 왔고 전쟁 명분을 축적해 갔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일본군은 서해안 아산만의 풍도(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숨어 있었다. 청군을 싣고 조선으로 들어오던 청나라 함정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하여 모두 수장시켰다.

이렇게 청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리고 이내 조선 땅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이민족 간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아야 했다.

청나라는 대국이라는 만용으로 근대화가 늦어진 데다, 실권자 서태후의 사치와 관료들의 부패로 망해가고 있었다. 일찍이 근대화를 이룩하고 전쟁준비를 해 왔던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청나라는 조선 땅에서의 패배뿐만 아니라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까지 점령당했다. 청국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었던 북양함대까지 괴멸되는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피해국임에도 2년 치 국가예산이 넘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의 지배권까지 일본에 넘겨줘야 했다.

랴오둥 지방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의 괴력에 놀라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견제하게 된다. 일본은 할 수 없이 랴오둥반도 등 일부 점령지를 뱉어내고 잠시 후퇴했다.

조선은 목을 조여 오는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는 절박함으로 몸부림쳤다. 그 가운데 민비(나중에 황제국이 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가 있었다. 일본에게 민비는 눈엣가시였다. 급기야 일본은 낭인들을 궁궐에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군부대신 안경수, 궁내부대신 이경직,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및 많은 장졸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외국의 한낱 낭인들에 의해 나라의 정궁(경복궁)에서 왕비와 각료 및 군 지휘관들까지 무참히 짓밟히는 치욕에도 속수무책이었다. 힘없는 나라의 비극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정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야반도주(?)를 하는 아관파천(1896년)까지 감행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국정이 요동칠 때마다 내각이 바뀌고 피비린내가 이어지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어 갈 수많은 인재들도 죽어갔다.

조선은 1897년 명분상으로나마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임금은 황제로 등극한다. 말이 좋아 황제 국이지 국운은 오히려 계속 기울어 갈 수밖에 없었다.

1900년,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영혼이나마 달래기 위해 추모시설을 세우도록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장충단이다. 장소는 조선시대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이었다. 지금의 장충단 공원을 포함한 그 일대 지역이다. 다음 해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조선왕조실록은 고종 37년(1900년) 10월 27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전 남소영의 유지(遺址)에 장충단을 세웠다. 원수부에서 조칙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국립현충원이 조성된 것이다. 그때의 장충단에 속했던 면적은 지금 장충단공원보다 몇 배나 넓었다. 현재의 장충단공원을 포함하여 신라호텔, 국립극장, 자유센터, 서울타워호텔 터를 아우르는 큰 규모였다. 그러나 매년 춘추로 2회씩 지내던 제사마저 일본의 방해로 1908년에 중단되고 만다.

그리고 1910년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어 오던 대한제국은 한일합병으로 종말을 고했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과 사법권, 인사권까지 빼앗겨 사실상 주권을 잃은 상태였다.

한일합병 후 일본은 조선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장충단은 해체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을 조성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꾼 것처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는 위락 시설로 바꾸었다.

일제는 장충단에 안중근 의사에게 척살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기리는 박문사를 세웠다. 일제가 박문사를 지을 때 정문은 경희궁 정문을 뜯어와 지었다. 박문사 건물의 석재는 광화문을 허물어 사용했다. 부속건물 건축자재도 경복궁의 일부 전각을 해체해 사용했다.

일제는 고종황제의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의 석고각을 뜯어와 종각을 짓는데 썼다. 게다가 장충단공원 한편에 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다.

일제는 우리 민족혼이 담긴 시설들을 하나씩 파괴하여 그들이 숭배하는 인물을 기리고,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는 시설에 사용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립현충원이라 할 수 있는 장충단, 그러나 이 제단은 일제의 만행으로 이렇게 파괴되었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박문사 건물은 해방 후 10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물론 용도는 달라졌다. 그리고 1959년도에 비로소 철거되었다. 1946년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 터는 장충단 비석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그런데 또 웬일인가? 1967년 정부는 어이없게도 그 터를 민간에게 불하하고 말았다. 역사의 현장은 사라지고 공원은 반쪽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금단의 구역이 되고 말았다.

장충단 비석은 이 무렵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랬으면서도 제 자리를 민간에 내주고 지금의 공원입구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공원 입구에 남아 있는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대한제국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충성을 칭찬한다는 뜻이다. 일부 지상파 방송에서까지 “충성스러운 장수(將帥)를 위한 제단”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장충단의 장(獎)자는 장수 장(將)자가 아니고 칭찬할 장(獎, 또는 권장할 장)이다. 비석에는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뒷면에 새긴 비문은 그 당시 육군부장이던 민영환이 짓고 썼다.(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하고 말았다.)

공원 내에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의 1층에는 이 공원의 설치 배경과 일제를 거치면서 상처받았던 역사적 사실들을 음미해볼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장충단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 한장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장충단공원을 안내하는 조형물 ⓒ소셜포커스

장충단 비석과 석등 ⓒ소셜포커스

장충단 비석과 석등 ⓒ소셜포커스

장충단공원 내 기억의 공간 외부 모습 ⓒ소셜포커스

기억의 공간 설치 취지와 장충단 건립 배경이 안내된 입구의 전시물 ⓒ소셜포커스

기억의 공간 설치 취지와 장충단 건립 배경이 안내된 입구의 전시물 ⓒ소셜포커스

장충단 비문을 쓴 민영환,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장충단 건립 취지 ⓒ소셜포커스

고달픈 대한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물 ⓒ소셜포커스

고달픈 대한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물 ⓒ소셜포커스

박문사와 관련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박문사와 관련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장충단의 현대사 등이 소개된 전시물 ⓒ소셜포커스

장충단의 현대사 등이 소개된 전시물 ⓒ소셜포커스

장충단의 현대사 등이 소개된 전시물 ⓒ소셜포커스
공원은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곧바로 공원으로 연결된다.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성이 아주 좋다.

필자는 이 공원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공원에서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는 공원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주탐방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미니 인공폭포인 벽천에서 생태연못으로 이어지는 실개천을 따라 설치된 데크로드가 아닐까 싶다.

실개천의 이름은 남소문동천이다. 벽천에서 시작한 이 개천은 산책로를 따라서 흘러가다 수표교를 지나 동대입구역 근처 연못에서 끝난다. 지하철 구간에서 나오는 지하수를 흘려보내고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

이 하천은 원래 남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광희문 앞을 지나 도성 밖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구간이 복개되어 있고 장충단 공원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개천의 바닥과 양변은 돌과 바위, 풀숲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들꽃도 경치를 거들고, 개천 위로는 키 큰 나무들이 조화를 이룬다. 개천 조경의 백미라고 할 만큼 멋진 풍경이다.

2년 전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데크로드는 높이 차이가 별로 없음에도 중간 중간에 단차가 있어 휠체어 통행이 불가능한 차별구역이었다. 공원 안에는 경로당이 있어 노인들도 많이 찾는 곳인데, 노인보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통행할 수 없었다. 데크로드의 단차가 때로는 이동약자에게 위험시설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2018년 9월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여 달라고 서울시에 진정서를 냈다. 서울시는 예산이 마련되는 대로 시정을 하겠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리고 작년 어느 때인가 가보았더니 데크로드 교체공사를 하고 있었다. 흐뭇했다.

그리고 본지에 연재될 탐방기를 쓰기 위해 최근에 다시 방문했다.

데크로드 전 구간이 단차 없이 무장애 공간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마침 노인보행기를 이용하는 어르신 한분이 데크로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안전하게 킥보드를 즐기는 어린이들도 보였다. 유모차도 보였다. 휠체어나 스쿠터를 타고 온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많았다.

무장애 환경에서는 장애인은 물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출처 : 소셜포커스(SocialFocus)(http://www.social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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